또 하나의 여행 _ 바라나시 버닝가트
오철만 2010-01-21 오후 15:11:22
댓글 8 조회 수 1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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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를 감싼 바라강과 아씨강은 갠지스에 이르러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갠지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여행을 시작한다.

강을 따라 걷거나 골목길을 누비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두 가트 중 한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 다다르면 한동안 멈추게 되고 서성이게 된다.

가끔 릭샤를 타고 멀리까지 나아가도 결국은 메인가트나 마니까르니까 가트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화장가트에 도착하면 때때로 무엇을 더 해야할지 또 어디로 더 나아가야할지 몰라 한 동안 자리를 뜰 수 가 없는데, 그때는 잠시 멈추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기를 기다리면 된다.

딱히 해야할 일도, 보아야 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획이나 목적지가 사라져 편안해지는 것이다.

 

 

자욱한 연기와 살이 타는 내음 그리고 굳은 표정의 사내들이 공기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이 세계에서 따로 떨어져나온 공간 같다.

잠시 나의 표정도 굳어지는데, 그들의 표정을 담담히 마주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거나 눈을 감아도 피할 수도 없다.

또 눈에서 잠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고 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람람 사띠헤’, ‘람람 사띠헤’.

사람들은 생의 가장 화려한 축제에서도 부른 그 이름 ‘라마’를 부르며 골목을 누빈 후 마니가르니까로 향한다.

대나무 들것에 실린 시체는 그 골목길에서 마지막 적선을 베푼다.

‘그대 산자들이여 죽음이 곁에 있나니, 부디 삶을 허비하지 말고 생의 환희를 만끽하시게.’

짜이를 마시다 또는 길을 가다 그 노란 행렬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로 물러선다.

잠시 눈길을 주며 기도를 하기도 하고,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기도 하고, 그저 두손을 모으기도 한다.

먼저 가는 선배에 대한 예의처럼 보인다. 

그저 골목이 좁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하여튼 그 행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살아서처럼 죽어서도 신분에 따라 지나는 길이 다르고 화장터에서의 위치에도 구별이 있다.

왜냐고 묻지만 답을 해줄 이는 없다.

하지만 골목길들은 하나로 합쳐지고 결국 가트에 다다르기 위해 같은 장소를 지나야 한다. 

한 구의 시체를 태우는 데에는 보통 백킬로그램의 나무가 들어가고 돈으로 따지면 천루피 정도가 된다.

가족의 여유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를 높히 쌓고 그 안에 향이 좋은 샌들우드나 코코넛 기름인 ‘기’도 첨가한다.

이곳에서 화장될 수 있는 사람에도 자격이 있다.

성자처럼 이곳에서 태워질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고, 아기처럼 그냥 강물에 던져지는 경우도 있고, 뱀에 물린 사람처럼 올 자격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불가촉 천민은 말할 것도 없다.

가족들을 보면 모두 신분이 낮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강에 다다른 시체는 깨끗이 씻겨지고, 간단한 기도와 함께 나무에 얹혀진다.

머리를 깍은 상주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흐른다.

가족들은 쌀을 망자의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돈이나 평소 좋아하던 것들 예를들면 담배나 과자 심지어 술도 넣는다.

상주의 손에 들린 불이 옮겨 붙는다. 마지막이다. 우리네 입관식이 생각난다.

이제는 영원히 그의 몸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순간을 지켜보노라면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생각난다.

돌아가면 당신을 안아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하지만 돌아가서 정작 그 감정을 기억해내고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개 힌두인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인도의 여러 곳에서 죽음 앞에 대성통곡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이곳 마니까르니까에서는 그런 경우를 본적이 없는데 아마도 서로의 기도가 어루만져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가족의 굳게 다문 입이라던가 느린 동작 그리고 붉게 젖은 눈동자에서는 슬픔이 배어나온다.

 

강에 이르는 내리막길 우측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태초의 불이 타고 있다.

삼지창에 둘러 쌓여 영원을 이야기 하는 이 불과 시체를 태우고 있는 불을 말 없이 들여다 보라.

그 불들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듯 매순간 모양을 바꾸고 공기속으로 사라진다.

 

쌓여 있는 나무시체들 너머에는 몇 개의 짜이집과 작은 가게들이 있다.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한다. 짜이를 마시기도 하고 과자를 먹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짜이를 참고 가만히 앉아 있다. 짜이의 달콤함을 잊었을 것이다.

람이라도 불면 재가 날아와 짜이에 내려앉는다. 함께 마신다.

아무리 고요한 날에도 하늘로 날아오른 연기는 나의 코를 지나 폐에 들어온다. 그 짜이와 공기는 나의 몸에 한동안 머물며 내가 될 것이다. 죽음을 먹고 마시고 호흡한다.

더럽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다. 애써 아름답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러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타다 남은 살점을 뜯기 위한 개들의 으르렁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아이들과 사내 몇은 강물에 들어가 금반지나 금이빨 또는 동전들을 줍는다.

멀리 배에 올라 이곳을 지켜보는 관광객들의 얼굴이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를 나르는 사내들이 보인다.

짜이를 나르는 소년도 보인다.

배에서 나무를 내리는 사공도 보인다.

그 움직임들 속에에 정지된 가족들이 보인다. 

 

왜 이곳이었을까.

강의 시작인 거묵도 있고, 종착지인 강가사가르도 있지 않은가.

왜 하필 이 빛나는 도시 바라나시에서 생을 마감하는 축제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가.

지금 눈 앞의 불은 한 그루의 나무이지 않았던가.

그 나무는 한 때 물이고 흙이지 않았던가.

바위이고, 구름이지 않았던가.

그들은 모두 바람이고 공기이지 않았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그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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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 2010-02-18 오후 17:01 *.100.123.82

좋은 사진들입니다.좋은 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왜 이러한 인간 본연의 삷과 죽음이라는 행태를 타인(그것도 주로 인도)

에서 찾아 보려고 한 것일까요?

일본의 작가는 1970년대에 모순으로 가득찬 일본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후로 하나 같이 인도,네팔,티벳,몽고,아랍등으로 내 몰아 쳤습니다.

우리나라도 궤를 같이 하듯..지금은 거의 같은 곳,,때론 같은 풍경,,,심지어는 같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은듯 피사체에

담습니다.

선진화 된다는것은 결국 삷과 죽음을 도시에서 몰아냅니다. 삷과 죽음은 비일상적인 일상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위정자들이 장애자들을 평양에서 내 쫓듯 말이지요...

결국은 즐겁고 신나는 일상만을 추구 하는것이지요..

그렇지만 감추어진 곳에서 언제나 일상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삶과 죽음,,그리고 인간 행태..

저는 간혹 오픈화된 그런 풍경이 아닌 감추어진 도시의 비일상적 행태를 간곡하게 피사체에 담아보기를 희망합니다.

사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한 평론가가 이런 말을 하면서 탄식을 하더군요..

유럽의 그림같은  풍경으로  일상을 담는 한 작가에게 일본의 일상적 풍경을 의뢰 했더니..

한마디로 평론할 가치가 없는 그림들만 만든다고요..

그래서 이렇게도 사진이 발전한 현대에 

아름답고 그리고 리얼한 작품을 접해볼수 없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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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만 2010-02-21 오전 03:47 *.234.203.218

좋은 사진들입니다.좋은 글이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왜 이러한 인간 본연의 삷과 죽음이라는 행태를 타인(그것도 주로 인도)
에서 찾아 보려고 한 것일까요?

 

저는 한 번도 그들을 타인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인도의 사진이 많은 것은 제가 처음 인도를 여행한 1996년 이후 지속적으로 그곳을 방문해 왔다는 것과 그곳엔 여전히 삶과 죽음이 날것으로 널부러져 있다는 데 그 방문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찍건 아마도 그 주제가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에 대한 것일 겁니다.

 

일본의 작가는 1970년대에 모순으로 가득찬 일본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후로 하나 같이 인도,네팔,티벳,몽고,아랍등으로 내 몰아 쳤습니다.

 

일본의 많은 작가들이 인도 등의 장소로 떠난 이유와 우리나라의 요즘 작가들이 같은 장소를 찾는 이유는 같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주변을 돌아볼 시간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지요. 일본은 자신들을 돌아보기 전 많은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그 희생의 대상이 물론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 여러나라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에겐 그런 시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성장으로 바빴던 우리의 선배들은 정신이 없이 허겁지겁 달려온 후 갑자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이제야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는데 우물 안에서는 우물의 어둑함을 볼 수 없겠지요. 저는 더 많은 사진가가 더 많은 곳으로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궤를 같이 하듯..지금은 거의 같은 곳,,때론 같은 풍경,,,심지어는 같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은듯 피사체에 담습니다.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안의 존재들은 매 시간 같았던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인도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사람은 오히려 인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보편적인 무심함과 무책임함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선진화 된다는것은 결국 삶과 죽음을 도시에서 몰아냅니다. 삶과 죽음은 비일상적인 일상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위정자들이 장애자들을 평양에서 내 쫓듯 말이지요...
결국은 즐겁고 신나는 일상만을 추구 하는것이지요..

 

몰아 낸다기 보다는 몰아내려 발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행기간중 아주 많은 죽음과 삶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숨쉬는 공기처럼 함께 흘러갑니다. 힌두와 불교가 현대의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떨어져 있지 않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본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죽음을 삶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즉 삶 속의 죽음 또는 죽음 속의 삶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일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집요하게 규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감추어진 곳에서 언제나 일상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삶과 죽음,,그리고 인간 행태..
저는 간혹 오픈화된 그런 풍경이 아닌 감추어진 도시의 비일상적 행태를 간곡하게 피사체에 담아보기를 희망합니다.

 

아주 좋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물론 가치있구요. 제가 인도에서 담은 것이 비일상적인 것이라 느끼셨다면 아마도 제 사진이 제가 전하려 했던 내용과 많이 달랐나 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진은 이미 과거의 것인 것처럼 우리는 음악 이외의 것으로 현재를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과 저곳에 대한 이야기도 실은 그 구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없어 보입니다. 

 

사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한 평론가가 이런 말을 하면서 탄식을 하더군요..
유럽의 그림같은  풍경으로  일상을 담는 한 작가에게 일본의 일상적 풍경을 의뢰 했더니..
한마디로 평론할 가치가 없는 그림들만 만든다고요..

 

그 평론가가 한심하군요. 유럽의 그림같은 풍경을 담는 작가에게 일본의 일상적 풍경을 의뢰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더 한심한 예도 있지 않습니까? 매그넘의 작가가 담은 한국의 풍경에 환호하는 한국의 평론가들도 많으니 말입니다. 한국에 정신적 베이스를 두고 있는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일시적으로 떠나 보편적 세계관을 갖춘 후 한국의 풍경을 해석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사진이 발전한 현대에
아름답고 그리고 리얼한 작품을 접해볼수 없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저는 사진이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는 많이 좋아졌지만-사실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모두를 나태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인 질문들은 언제고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평론가들은 고작 한다는 것이 말초적인 문제들에만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찾으려는 사진가들을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시장의 논리지요. 그것의 원인과 결과는 물론 사진가와 평론가가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겠지만 그들도 할 말은 있을 겁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시대정신을 표출한다는 것이 시대를 넘어선 절대가치를 추구하려는 노력과 견줄 수 있을만큼 가치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글들에는 언제나 오해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늘 같은 용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인도인을 통해서 무엇을 보자는 식은 아닙니다. 사진 속에 인도인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인도를 여행했다는 말보다는 잠시 인도에서 살았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간단한 말조차 이해받기는 힘듭니다. 유경희님도 제게 그런 마음을 가졌을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야기를 건네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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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y 2010-04-06 오후 14:15 *.49.55.55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에서 인도를 보았고, 브래송의 인도 여행 사진을 자이플의 서점에서 보았던 기억으로

인도를 기억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예술은 누적적인 개념이 아닌 비누적적인 개념으로 표현해야 되는게 아닌지요.

사진(예술)은 누적적인(발전)개념이 아니라 ,비누적적인(모방,창조)의 개념이 아닌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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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 2010-02-22 오전 00:00 *.109.212.208

진심 어린 글 잘 읽었습니다. 한번도 뵌적이 없지만 아마추어에 불과한 저에게  좋은 소통의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드린 질문은 오선생님의 개인에 국한된 말은 결코 아닙니다.

개인적 의문에 대한 소통의 통로로서 오선생님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객기를 잘 거둬주심에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저도 여행을 떠나야 겠습니다.

다시 한번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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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빠리 2010-04-08 오후 12:22 *.144.43.160

저도 작년에 핫셀가지고 촬영하다가 총든사람한테 협박당했습니다.

촬영하지말라고

얼마나 무섭던지~~~ ㅜㅜ

너무나 좋은 사진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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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2010-04-29 오전 10:35 *.99.126.7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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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야르 2010-06-30 오전 04:23 *.36.235.161

너무 심취 하신거 같습니다...어서 돌아오십시요...^^ 한번 슬쩍 내려 봤을때 세련된 앵글에  눈이 가서...자세히 한번 봤어요...

사진에 비해 텍스트가 너무 길어 방해가 되는거 같습니다...사진을 위한 글인지...글을 위한 사진인지...그것조차도 뜬구름 잡는

얘기로 무마하신다면...카메라를 들 필요도 글을 쓸일도 없어야 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사진이 색이나 형태에 머물러 있는거 같습니다...한차원 너머 정말 인도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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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 2010-10-18 오후 19:27 *.163.1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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